목격 14
기쁨, 행복, 용서, 사랑.
우리가 배우는 첫 번째는 신은 차트의 바닥이 아니라 꼭대기에 있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비난하면 당신은 이원성을 설정한다.
에고가 당신의 동물 본능이 당신의 적이 되는 곳에서 당신은 회개하고 묵주기도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화내고 이기적이었다는 등으로 그렇게 된다.
어떤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에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동물적 유산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비난하는 대신 ‘물론 너는 이기적이지. 당연히 이기기를 원하겠지. 당연히 길에서 끼어드는 운전자는 죽어도 싸지. 우리는 그들이 누군지 알지만 투표를 잘 못한 그 사람들은 당해도 싸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당신은 에고가 그런 식이라고 추정한다.
모든 사람들의 에고가 그런 방식이다.
그것은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진화한 것이다. 그리고 더 긍정적인 감정으로 진화한다.
내 말은 가장 밑바닥에는 순수한 동물적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책감 수치심 증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열정, 헌신, 신뢰성, 전통적 미국의 전통적 미덕들로 진화한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생각할 수 있는 지점으로 전두엽이 진화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각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망상이다.
그들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신이 의식수준 400대에 이르기 전까지는 생각할 수 없다.
대부분의 유권자들이 생각할 수 없다. 하하하하
논리와 이성은 게임의 후반부에 올라온다.
논리와 이성은 기원전 350년 이후로 그다지 많은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등.
인간 마음의 어려움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외부에 있는 그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원성이다.
그것은 레스 인테르나와 레스 엑스테르나를 혼동한다.
인과율이라는 개념은 레스 인테르나, 레스 코기탄스이다. 그것은 thinking-ness이다.
저것의 원인인 이것이 있다는 생각은 인간 마음의 이원적인 지각이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세상에 투사하고 인과율이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학 자체도 양자역학조차도 450에서 460으로 측정된다.
인과율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다른 패러다임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뉴턴의 패러다임에서는 당신은 인과율에 사로잡힌다.
만약 당신이 인과율에 사로잡히면 영적인 학생으로서 당신은 저것의 원인이 되는 개인적이고 독립된 ‘내’가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책임 있고 처벌받을 수 있고 제한된 개인적인 나.
그리고 그것이 저것을 원인 짓는 그런 나.
그것을 결정하는 개인적이고 분리된 작은 나, 그것은 무한한 하나임에서 분리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