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의 본질 29
Q
그 모든 영적 작업들과 내맡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전이 없다고 느낄 때 어떻게 할 수 있나요?
A
나는 이미 그것에 대해 대답한 바있다. 오직 막다른 길에 부딪혔다고 느낄 때에만 중요한 돌파를 하는 것이다. 일이 술술 풀린다고 생각할 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Q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의식의식 수준이 높았는데 어떻게 그런 일들을 겪었습니까?
A
모른다. 그들의 카르마를 조사해봐야 한다. 어떤 이들이었는지, 무엇을 자초한 것인지... 그리고 문화적 시각에서 그들의 운명이 비극이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망상이다. 진부한 사회학적 시각에서 그렇다. 진정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겉으로 보이는 것을 넘어 가야한다. 일반적인 상식이나 이성에 의한 시각을 넘어, 그 사건이 해방은 아니었는지 알아봐야 한다. 재앙인지 해방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경우 재앙 덕분에 해방이 있을 수 있었다. 수년 간의 영적 추구에도 불구하고 지옥의 밑바닥에 있었는데, 그것은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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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우리의 통증과 고통에 기뻐하시지 않는다.(근육테스트 긍정)
그러면 누가 당신의 통증과 고통을 원하는가? 심판자다. 야만적이고 잔인하고 가학적이고 끝없이 냉혹한 내적인 심판자이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다. 그 심판자를 과소평가하지 마라. 이 심판자가 이르지 못할 잔인함의 정도가 없다. 20년간의 고통? 새 발의 피야. 20년 추가.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영혼이 지옥에 빠질 것을 두려워한다.
죄로 인해 당신의 영혼이 지옥에 가게 되는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믿을 수 없이 극단적인 고통에 던진다.(근육테스트 긍정)
나는 그것을 겪었기에 안다. 그걸로 고통 받았고 내 무의식에서 그것을 발견해서 수많은 영적 작업으로 그것을 해소해야했다. 그것은 뿌리 깊은 것이고, 고통이 영혼에 유익하다는 종교의 특정 이해에 의해 복잡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적은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당신을 파괴하는 외부적인 신이 아니라 당신 자신 안에 있는 것이다. 최근 나는 집단 무의식에서 그 구조를 발견했다. 당신은 오직 고통과 통증으로만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과 통증을 구원자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기독교의 반대이다. 당신의 구원자는 통증과 고통이다. 당신이 통증과 고통을 더 겪을수록 신의 진노는 더 누그러질 것이고, 고통이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된다.
나는 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수년간 그 엄청난 고통을 주는 것인지 궁금했다.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이 영원한 지옥살이에 던져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공포이다. 그것이 프로이드가 말하는 수퍼에고가 당신에 대해 가지는 통제 방식이다. 그리고 무의식에는 그것을 활성화시키는 원형들이 있다. 그것에 대한 기도와 명상, 자신을 용서하려는 자발성, 그것에 대한 해소, 자신을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자비롭겠다는 자발성. 나는 고전적인 정신분석을 받았다. 아주 성공적이었고 아주 훌륭한 전문가였다. 정신분석 훈련에서는 언제나 환자의 수퍼에고의 측면에서 접근하도록 훈련받는다.
무의식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내기 전에 우선 양심인 수퍼에고를 누그러뜨린다. 그렇지 않으면 환자는 공격받게 될 것이다. 사납고 악의적인 수퍼에고가 있는 상태에서 근친상간 소망이 올라왔다면 자살충동적 우울증으로 가게 될 것이다.
최종 수정: 2019년 3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