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 18
그러므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뉴턴의 현실 패러다임에 제한된다.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측정수준 499까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선형적인 영역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증명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이미 제한된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존재를 증명할 것인가?
어떻게 무한을 증명할 것인가? 어떻게 신성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들은 모두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다.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의 한계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주어와 술어라는 에고적인 일인 것이다. It’s an egoistic proposition of subject and predicate.
논리법칙과 합리성에 종속되는 주어와 술어이다.
증명을 넘어서 있다. 그래서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이제 신비적이라고 불린다.
진리의 개시는 저절로 광휘를 발한다.
계시는 분리된 개인적인 자아, 에고 그리고 그 정신화라는 환상을 대체한다.
모든 종교에서 그 종교의 신비가들은 그 제도화된 종교보다 더 높게 훨씬 더 높게 측정된다.
내재적 신과 초월적 신.
진리에 이르는 근본적인 신비가의 길이 내가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모든 것을 let go하면, 만약 당신이 모든 형상들을 let go하면, 당신은 내면의 지속적인 현존으로서 의식 그 자체를 경험할 것이다.
TV set는 거기에 어떤 프로그램이 방영되건 언제나 켜져 있다. 그리고 당신은 그 프로그램을 보는 것을 멈추고 이렇게 말한다.
언제나 켜져 있는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꿈을 꾸는 것을 알게 하고, 나로 하여금 몸의 느낌을 알게 하고, 센세이션을 알게 한다. 거기에는 어떤 기본적인 전제premise가 있다.
그것은 선험적인 것이고 선행되는 것이다. 그것이 경험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신비가는 내면을 본다. 그리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부정의 길을 통해 혹은 긍정의 길을 통해 에고의 한계들을 계속 초월한다.
진리는 형언할 수 없는 것이다. 정의할 수 없고 근본적인 주관성은 경험적인 것이다.
이전에 있던 것을 대체하는 것은 상태이다.
맥락이 내용을 대체한 것이다. 그것에 대한 외부는 없다. 그리고 정신화의 인위적인 산물과는 어떤 관계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명사, 형용사, 동사, 타동사, 자동사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가고 있는 상태는 전통적으로 깨달음이라고 불렸고 그것은 에고의 초월이다.
에고가 다른 상태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전의 상태가 대체되는 것이다.
이제 개별적인 개인적인 자아였던 마음은 무한한 하나임에 녹아버렸다.
이것은 이제 다른 상태이다.
그러므로 깨달은 사람은 없다. So there’s nobody who is enlighten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