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복 10
그래서 내가 불신자이기 때문에 나를 죽임으로써 신을 기쁘게 하고 경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여전히 그들의 의도의 타당성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신을 경배하는 길이 모든 불신자들을 죽이는 것이라면, 그러면 나는 그 순진함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그 올바름을 보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나는 그 순진함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가 당신을 죽일 때, 당신은 ‘오케이, 이해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십자군 전쟁 시의 경험을 말씀하심.)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어울리지는 않을 것이다.
점심초대를 하지도 않을 것이고.
솔직히 나는 그들이 시간을 보내는 곳에서는 식사하러 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날이 그 레스토랑을 폭파하기로 한 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하하
진리는 맥락에 달려있다. 전체적인 의도가 전체적인 맥락을 설정한다.
비선형이 장을 설정한다. 어떤 것이 선한지 약한지는 그 자체를 들여다보는 것으로는 분별될 수 없다. 오직 맥락 안에서만 분별된다.
우리 사회에는 음모론과 논리 증명 망상장애자들이 있다.
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정신 병원과 같은 문제에 가깝다. 그리고 토마스 자스에 의해 대중적이 된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도 있다. 그는 정신병을 단지 이름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신병원들을 폐쇄했다. 그래서 위험한 사람들은 지금 모두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그들은 연민으로 자신들의 한계로부터 보호되었었다. 나는 내가 이 사람을 내보내면 그가 무슨 일을 할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범주는 타인에 대한 위협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안전이기도 했다. 생존할 수 있고 자신의 기본적인 필요를 돌 볼 수 있는 능력.
그래서 충분히 좋아질 때까지 병원에 둔 일부는 스스로 생존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이름붙이기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그들은 지금 마약중독자가 되어 거리에서 지내고 범죄를 저지르고 살인 당하거나 서로 죽인다. 그러다가 감옥에 간다.
우리는 의식수준의 바닥을 보았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의 평균적인 의식수준은 65이다.
의식수준 65에서 사람의 생존은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자신이 약을 먹고 진료 받는 것 그리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 등을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 보호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의도는 모든 사람들의 선과 복지이다.
그래서 우리가 품는 하나의 영적 금언은 사랑과 배려 그리고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그것들을 당신 자신의 의지의 맥락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하는 이유는 모두의 선을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돕기 위해 뭘 할 수 있느냐고 말한다.
글쎄, 당신은 세상일에서 물러나 있으면 된다.
의도는 당신이 된 바이다. 당신이 된 바가 세상의 부정성을 상쇄한다.
지금 여기 앉아있는 이런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세상의 부정성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그것이 인류를 파멸시켰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