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의 본질 12
지금 현재 우리 사회의 신은 과학이다. 고대에 인간은 해답을 종교와 신에서 구했다. 구원을 신에게 구했다. 수세기 동안 부정성의 신을 공부했지만 그걸로는 멀리 가지 못했다. 이단 심판이나 그런 것들을 겪으며 고통을 겪었다. 이제 인류는 과학을 바라본다.
논리는 대부분의 종교가 수천 년 전의 특정 인물들의 경험에 대한 역사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만 강조되어 남는 경우가 많다. 부처님도 자신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는데 불상이 이 행성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이미지가 된 것과도 같다.
역사와 지역, 부족적이고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특이성에 대단한 중요성이 부여되어졌고, 그것들이 종교에 포함되었다. 이제는 비밀스러운 경전과 종교적 관습의 일부가 되어 본래 거기서 비롯된 진실까지 가리게 되는 것이다. 터번을 쓰거나 말거나 그런 것이 어떻게 절대적이고 무한한 실상의 신의 현존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면에 있는 진실로서의 신의 실상과 신의 현존과 완전히 아무 관계가 없는 것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다. 터번을 쓸지 여부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모르겠다.
1930년 대의 기독교는 무서웠다. 나중에 내가 무신론자가 된 것이 놀랍지 않을 정도다. 어떤 온건하고 지적인 사람이라도 무신론자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바로 그렇게 되었다.
죄책감에 대한 계속되는 공포. 그것은 단지 죄책감이 아니었다. 죄책감에 대한 공포였다. 영적으로 더 진화하면서 밖에 있는 것들의 결과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내적인 반응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이것을 안다면, 나는 죄책감에 시달릴 거야. 이런 식인 것이다.
은행에서 볼펜을 훔칠 것인가 말 것인가, 만약 내가 훔친다면, 나는 죄책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리고 볼펜을 볼 때 마다 죄책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죄책감을 느낄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스스로 자신의 내면의 구루가 된다. 당신은 볼펜을 훔치지 않는다. 죄책감이 올라올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스스로 알아서 한다. 자신에 대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책임을 진다. 그리고 당신은 온전성에 도달한다. 온전성이 없으면 모든 비난을 밖에 있는 무엇인가에 투사하기 때문이다. 의식수준 200에 도달하면 책임을 지게 되고 죄책감의 근원이 자신이라는 것을 보기 시작한다.
우리가 오늘 아침에 한 것은 인류 역사상 앞으로도 결코 행해지지 못할 것이다. 그 어떤 그룹도 현존하는 가장 지성적인 방법으로 집단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찾는 신의 실상, 영적인 실상을 확인하지 못할 것이다.
최종 수정: 2019년 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