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의 본질 15
어떻게 이성을 초월할 것인가? 고등 이론 물리학으로는 하지 못한다. 확실히 그 실상을 보여줄 수는 있다. 우리가 얘기한 측정 기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그 아름다움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측정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방금 그걸 했다. 그 성질은 형용하기 어렵다. 우리는 아름다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바이올린이 어떤 음조를 켤 때 뒤통수의 머리카락이 바짝 서는 것은 그 성질이다. 그것은 의식의 다른 성질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성을 초월한다.
신에게로 가는 전통적인 길에서 종교의 긍정적인 측면은 인간의 영의 운반자로서의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세상의 대성당들, 특히 유럽의 대성당들은 물질 영역에서의 인류의 가능한 가장 위대한 성취로 묘사된다. 어떤 성당들은 끝없는 생애, 수천 년간 건축되었다. 여러 세기 동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전 생애를 하나의 설교단을 조각하는 데 바쳤다. 자신의 일생을 이 설교단의 세 단계의 형상을 조각하는데 바쳤다. 단지 하나의 조각에 전 생애를 바친 것이다. 그것이 위대하고 전통적인 길이다.
사랑이며 평화이며 아름다움인 현존의 다양한 측면들을 경험하는 것. 개념으로서의 아름다움이 아니고 예술적 감상으로서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지각되는 그 아름다움이 올라오는 본질을 경험한다는 알아차림awareness이다. 전통적인 종교는 그것을 이해했다. 신에 대한 묘사는 무서운 괴물과 같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본질이 유지되고 지속되었다. 만약 거기에 진실이 없었다면 그 자체의 부정성으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500대의 상태는 명상이나 진언으로도 일어난다. 생각함, 말, 지성과의 동일시에서 물러나 감지하는 것이다. 지성과 생각 아래에 있는 알아차림awareness의 장을 감지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 혹은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생각함이 멈추기 시작하면 아름다움의 놀라운 영향이 경험의 전체성을 나타낸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지금 그것을 말로 조각내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향, 음악, 챈팅, 음악에 맞춘 사람들의 몸 움직임, 불빛이 반짝이던 벽감, 모든 상황의 순수한 신성과 존중이었다.
신성한 것에 대한 존중이 500으로 가는 길을 여는 하나의 통로이다. 의무감이나 결과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가 아니라 자의적으로, 부정적인 신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부터가 아니라 진실에 대한 사랑으로, 삶의 성질이자 방식인 사랑임에 대한 헌신으로 그것을 한다.
우리가 말하듯 사랑임은 뒤집어진 벌레를 보면 멈추고 돌아가서 바로 뒤집어 주는 것이다. 골목에서 벌레가 뒤집어져 있으면 당신 안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연민이 올라오고, 그것이 당신을 500으로 데려간다.
오늘 나온 질문중 하나가 연민에 관한 것이다. 영적인 본질로 채식주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채식주의에 대해서는 이전에 다룬 바 있다. 그것을 맥락화하는 많은 방식이 있다. 그것은 단지 희생시키는 것일 수도 있고, 금요일에는 생선을 먹지 않는 것 같은 종교적인 규율일 수도 있다.
최종수정: 2019년 2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