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고수준의 깨달음

4. 신과 창조에 대하여, 근육역학, 극성의 초월

by 빌보 배긴스 2016. 3. 16.

4. 신과 창조에 대하여, 근육역학, 극성의 초월

 

니코의 경험

당신이 박사님 강의를 이해하지 못해서 절망스러울 수 있다. 그래도 계속 들으라. 에고는 박사님의 가르침에 저항할 것이다. 가르침을 이해하고자 죽도록 노력해 보라. 그러다가 포기하는 순간이 온다. 그냥 박사님의 자료에 계속 자신을 노출시켜라.

부처님, 예수님 그리고 크리슈나 조차도 이렇게 말했다. ‘가장 가까운 사도들조차도 faith라는 문을 넘어와야 한다.’

박사님은 단순히 길은 곧고 좁으며 시간은 매우 짧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곧장 앞으로 가라고 하신다. 계속 집중하다 보면 당신의 지각하는 눈에 완전히 새로운 행성이 보여 질 것이다.

 

박사님 말씀

여기 이런 강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들은 야구 경기를 보러갔을 것이다.

신을 거대한 전자기장이라고 그려보라. 그 힘은 무한하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나타나지 않은 것에서 나타나는 것이 떠오르는 모든 창조의 근원이다. 그것은 지속적이다. 그래서 당신이 연쇄적인 지각으로 목격하는 것은 창조의 펼쳐짐이다. 하지만 어떤 것도 연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지각일 뿐이다. 만약 당신이 걸어 다니면서 이런 저런 홀로그램을 본다면 당신이 그런 것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그것들을 연쇄적으로 보지만 그것을 그런 식으로 목격하는 것은 지각이다. 홀로그램에는 순서가 없다. 그저 거기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신이 움직이므로 당신은 그것들이 움직인다고 보는 것이다.

창조와 진화는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모순도 없다. 진화는 창조가 펼쳐지는 방식일 뿐 이다.

존재할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에너자이즈된다. 근원은 창조로서의 무한한 신의 현존이다. 모든 것들이 나타나게 한다.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 카르마적 유산에서 떠오르는 내재적인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 씨앗하나가 있다고 하자. 당신은 그것이 피어나라고 강제할 수 없다. 그것의 발아를 cause할 수 없다. causationforce이기 때문이다. 창조는 power이다.

다른 한편, 작은 햇살과 빗방울, 당신이 그 씨앗의 카르마적 잠재성을 나타나게 하는 조건을 제공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잠재성을 실재화 하는 것은 장의 무한한 힘이다. 그러므로 창조는 지속적인 것이다. 어떤 것도 자신 안에 스스로의 존재를 창조할 수 있는 power가 없다. 그것이 무신론자들에게는 궁극적인 장벽이 된다.

사람은 다시 인과율로 옮겨가서 당구공 이론은 어떠냐고 묻는다. .

인과율은 환상이다. 그것은 에고와 과학 법률의 핵심이며 460으로 측정된다. 측정 수준 460으로 온 우주를 설명하고 신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다윈의 진화론은 455로 측정된다.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한한 잠재성으로 인한 것이며 잠재성이 실재성이 되는 것은 장의 힘으로 인한 것이다.

내가 근육 역학 시연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 방의 사람들과는 다른 것을 보았다. 그들이 근육역학을 시연하면서 그 것을 국소적인 현상으로 추측했지만 내게는 그것이 비국소적인 반응이라는 것이 명확했다.

무한한 실상은 형상이 없다. 내 가르침을 나는 헌신적 비이원성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헌신이란 그 무엇보다 진실에 대한 사랑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당신은 거기 몰두한다. 그렇게 하는 데는 선형, 비선형에 대한 강렬한 drive가 필요하다. 헌신, 영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육체적인 죽음을 포함해서-자발성이라는 에너지 없이는. 무한한 힘이라는 무한한 장.

그 안에 보이지 않는 형상 없는 에너지가 있다.

포스와 파워의 차이. 포스는 선형적이고 형상을 가진다. 형상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당신이 진실을 정의할 때 선형은 내용이며 비선형은 맥락이다. 맥락을 정의하지 않고 진실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서양의 위대한 책이나 위대한 철학자들이 존재론의 문제에 대한 답을 주지 못했다. 당신은 객관성에서 주관성으로 옮겨가야 한다. 객관성은 당신을 499로 데려갈 것이고 거기서부터 당신은 주관성으로 옮겨간다. 신의 현존은 생각을 통해 경험될 수 없다. 그것은 주관적인 것이다.

인간의식 수준은 대체로 차크라 시스템에 상응한다. 증오는 비장에 해당되고 70에서 온다. 세상에는 이 수준의 사람들이 많으며 이 수준으로 측정되는 나라들도 많다. 사실 그 수준은 코모도 드래곤과 유사하다.

현재 여러 나라의 독재자들은 인간 형상을 한 코모도 드래곤보다 더 사악한 수준이다. 그리스도는 양의 탈을 쓴 늑대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를 얘기 하셨다. 늑대라니. 그보다 더한 코모도 드래곤이다. 더 심각하다. 사람들은 그런 독재자들에게 투표하고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추종한다. 코모도 드래곤 보다 더 낮게 측정되는 존재를 죽음을 불사하고 따르는 것이다.

코모도 드래곤은 순수한 의도로 물어 죽인다. 먹기 위해 그러는 것은 정말 사악한 의도라고는 할 수 없다. 배고파서 먹을 뿐이다.

그러면 당신은 양의 탈을 쓴 늑대를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 그 열매로 알아보라는 대답을 갖고 있지만 당신이 그 열매를 확인할 수 있을 때에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이고 수천의 시민들이 죽어나간 후이다.

내가 근육역학을 봤을 때 나는 장과의 연결을 보았다. 비개인적 장. 의식 자체가 진실의 존재를 알아본다는 것이다. 의식혁명을 쓸 때 나는 근육역학으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아는 것은 참과 참아님이었다. 그건 꽤 다른 것이다. 진실을 알아보고 진실 아닌 것은 알아보지 못한다.

이것은 반대되는 극성에 대한 영적인 죄책감을 없애준다. 이것은 좋아하고 저것은 싫어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죄책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당신은 바닐라를 싫어하지 않고도 초콜렛을 좋아할 수 있다. 당신은 바닐라를 싫어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단지 초콜렛을 선택한다. 자유주의자들을 미워하지 않고도 우익에 있을 수 있다. 당신이 자유주의자라면 초콜렛인 보수주의자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은 그냥 바닐라가 좋은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반대되는 극성을 녹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