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성 39
700대부터는 대개 바뀌지 않는다. 왜인지는 모른다. 이 때부터는 황홀하지 않다. 극단적인 고통이 자주 있다. 살짝이라도 어긋나있는 것에 대해 아주 예민해진다.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 아우라에 강력한 고통이 있다.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웠고, 고통은 때로 심각한 정도였다. 몇 시간 혹은 수 일 동안 지속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이 어긋났는지를 발견해서 교정하면 고통이 사라졌다. 다음번의 사소한 일이 오면 다시 시작되었다.
당시 그것을 한탄하고 있던 때가 있었다. 당시 한국에 있었는데 수잔이 호텔의 서랍에서 불경을 꺼내서 펼쳤다. 거기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그가 마군에 포위되어 고통스러웠고 뼈가 부러지는 듯 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듣는 즉시 나아졌다. 정말 멋진 순간이었다.
오늘 아침 강연시작 전에도 나는 무엇이 어긋난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이 아트믹 바디의 제 삼의 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트믹 체의 제삼의 눈에 뭔가가 있었는데, 그것은 루시퍼 에너지였다. 그것은 이득을 찾는 영적인 에고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영적인 에고는 절대적인 확실성의 파워에 끌렸다. 절대적인 파워와 절대적인 확실성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즉시 그것을 향해 왔고,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마치 절대적인 확실성의 전달자인, 존재안의 힘을 움켜쥐려는 것 같았다. 어떤 존재의 잔존이 어디에선가부터 오고 있던 것 같았다. 그 영적인 에고는 개인적인 것이었다. 그 잔존은 개인의 영적인 에고에서 온 것이었고, 힘이라는 생각에 이끌린 것이다.
영적인 정화는 지속적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더 많이 배울수록 모든 틈새를 지각하는 통찰력이 날카로워진다. 당신은 언제나 그것들을 본다. 나중에는 매트리스 아래의 콩을 느끼는 공주의 예민함 같은 것이 생긴다. 그것이 오는 순간 무언인가 어긋나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즉각적으로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본다.
에고에 대한 지식으로 사람은 무엇이 작동하는지를 추정하고 근육테스트는 그것을 확인해준다. 만약 그렇다면 반대되는 것을 선택한다. 영적 확실성의 절대성에 대해 감사한다. 그것을 대안적인 것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진화하면서 어떤 시험이 있을 것이다.
Q
영적인 진화에 종착점이 있나요?
A
신의 본성에 대한 내 이해로는 그렇지 않다. 의식의 진화는 영원한 것이다. 시작과 끝은 그 자체가 한계인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끝은 없다.
시작과 끝은 언어화의 개념과 정의일 뿐이다. 그러므로 무한인 것은 시작과 끝을 가진 것과는 양립할 수 없다. 그래서 시작이 없기 때문에, 실상에는 끝이 없다.
모든 측정치는 이것이 시작이고 이것이 끝이라고 말하는 에고의 자의적인 위치성일 뿐이다. 하나의 끝은 다음 연쇄를 촉발한다.
최종 수정: 2018년 10월 8일